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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봉천동 슈바이처` 윤주홍 원장

맑은샘77 2007. 11. 5. 23:22
http://memolog.blog.naver.com/tsk1212/3
출처 블로그 > 신나는 세상
원본 http://blog.naver.com/ironheel2/20022793832
서울 관악구 봉천동. 지금이야 널찍한 도로에 고층 건물들이 빽빽이 들어선 익숙한 풍경의 서울 땅이지만 30년 전만 해도 봉천동이란 지명은 곧 판잣집과 달동네란 의미로 통했다.
  “청계천이 복개되면서 그곳에서 살아가던 빈민들이 하루아침에 터전을 잃게 되었어요. 나라에서 그들을 위해 마련한 거처가 바로 봉천동이었죠. 판자촌, 달동네 같은 말들이 처음 생겨나기 시작한 것도 그 즈음이었죠.”
  봉천동 차로 한쪽에 있는 ‘윤주홍 의원’. 간판의 모양과 크기만 조금씩 달라졌을 뿐 30년 전이나 지금이나 이곳 주민들의 아픈 곳을 어루만져주는 일만큼은 변함이 없다. ‘봉천동 슈바이처’로 불리는 윤주홍 병원장 때문이다.

  윤주홍 원장이 봉천동에 자리잡은 것이 지난 1974년이니 봉천동 주민으로 살아온 지 올해로 벌써 33년째다. 1968년에 의사 면허를 따고 경찰병원에서 수련의 생활을 마치자마자 처음 개업한 곳이 이곳이었으니, 그의 삶은 올곧게 봉천동 주민과 함께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느 날엔가 버스를 타고 가는데 펑크가 난 거예요. 수리하는 동안 시간이 남길래 버스에서 내려 주위를 돌아보는데 골판지 밑에 사람 다리가 나와 있지 뭐겠어요. 죽은 사람인 줄 알고 깜짝 놀라 가보니 골판지로 만든 집이지 뭡니까. 다섯 식구가 살고 있었는데 제일 맏이가 키가 커 발이 집 바깥으로 나온 거였죠. 둘러보니 사방이 온통 그런 집들뿐이었어요. 바로 복덕방을 찾아 구두로 병원 터를 계약했습니다. 이곳 사람들과 함께해야겠다고 다짐한 거였죠.”

봉천동에서 시작한 나눔의 삶
  가진 것이라곤 골판지와 판자로 만든 집, 거기에 몸뚱이 하나뿐이었던 사람들에게서 넉넉한 치료비를 기대하는 것은 처음부터 무리였는지도 모른다. 하루 종일 일을 해도 시간이 모자랄 정도로 환자들이 찾아왔지만 치료비를 가져오는 사람들은 거의 없었다.
  “버스나 택시에 부딪쳐 다친 사람은 그래도 나은 편이었어요. 운수회사에서 치료비를 대줬으니까. 치료비의 3분의 1만 가져오는 사람, 그나마 한 푼도 없는 사람…. 돈이 없다는데 어떻게 받을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고 돌려보낼 수도 없는 노릇이고요.”
  그나마 수술 환자, 입원 환자들에게서 나오는 치료비는 고스란히 돈 없고 힘 없는 사람들에게 들어갔다. 30년이 넘게 인술을 펼치는 동안 잊지 못할 일화도 많았다. 돈을 못 드려 죄송하다며 편지를 남기고 간 환자도 여럿이었고 몰래 도망친 사람도 있었다.
  “어린 아이 하나가 교통사고로 입원을 했어요. 서너 달 후에 완치가 됐는데 ‘갈 데가 없다’고 하는 거예요. 한 2년 정도 같이 살았죠. 하루는 간호사들이 원장님이 곧 치료비 받아낼 거라며 놀렸던 모양이에요. 겁을 먹고 그 길로 집을 나가고 말았죠. 그 후 우연히 시장에서 마주쳤는데 배추 꽁다리를 집어 먹고 있더군요. 함께 집을 찾아가 곰팡이 가득한 솥을 여는 순간 눈물이 나더군요. 당장 연탄과 쌀을 들이고 돌봐줬죠. 비슷한 경우가 몇 차례나 더 있었어요.”

  사회에서 소외받고 힘없는 이들과 함께한 윤 원장의 삶은 사실 봉천동이 처음은 아니었다. 어느 누구도 관심을 갖지 않던 도시 속 외딴 섬이 병원을 연 봉천동이었다면, 실제 바다 한가운데 떠 있는 도서 지역 주민들의 경우도 의료 혜택이나 병원이라는 말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이었다. 충남 서산이 고향인 윤 원장은 어렸을 때부터 섬사람들의 고충을 가까이서 보고 자랐다.
  치료를 미루고 미루다 막상 뭍에 발을 디뎠을 때는 이미 죽음의 문턱에 이르곤 하던 상황이 비일비재했던 것이다. 경찰병원에서 정형외과 전문의로 수련의 생활을 막 시작하던 1971년도부터 12년 동안 1년에 두 차례, 많을 땐 네 차례 이상 서해안 일대의 낙도를 돌며 의료봉사를 했다.
  “지금이야 병원선도 있고 좀 큰 섬에는 보건소도 있죠. 하지만 당시엔 의료기관이라는 게 전무했어요. 통통배를 타고 한번 찾아가면 일주일 정도 지내면서 환자들을 보곤 했어요. 주로 위장병, 관절염, 피부병 등이 많았지요. 외연도라고 중국과 제일 가까운 섬에도 갔었고, 배를 빌리기 어려울 때는 경찰병원에 근무한 덕도 봤어요. 현지 경찰에 연락하면 도움을 받을 수 있었으니까요.”

할머니가 일러준 8할의 삶
  정말 큰맘 먹지 않는 이상 의사를 만난다는 게 좀처럼 쉽지 않았던 섬사람들. 버선발에 손을 흔들며 뭍에서 찾아온 의사와 간호사들을 반길 법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못했다. 어렵게 배를 타고 도착한 섬에서 일행을 맞은 건 의구심에 가득 찬 시선들이었다.
  “제일 먼저 해야 할 것이 섬사람들의 신뢰를 얻는 일이었어요. 멀쩡하게 생긴 사람이 돈도 받지 않고 치료해준다고 하니 괜한 의심을 살 수밖에. 지금처럼 자원봉사를 많이 할 때도 아니고. 비 오는 날 여관에서 받아주지 않아 혼쭐이 난 적도 있었어요.”
  마을 주민들의 신뢰를 얻는 일은 한두 해에 끝나지 않았다. 매번 약속한 날짜에 섬을 방문하고 그들과 함께 어울리며 삶의 방식을 공유하기 시작하면서 젊은 의사의 순수한 의지는 섬사람들에게 전해지기 시작했다. 무의도에서 주민들을 위해 그가 한 일은 단순히 아픈 곳을 치료해주는 데 머물지 않았다. 교육시설이 필요한 곳에는 군청에 꾸준히 청원을 넣어 분교를 만들기도 했고, 격년제로 마을 주민 전체를 서울로 초대하기도 했다. 그렇게 12년 동안 맺은 인연은 여전히 서울 의사 선생님을 잊지 않고 찾아오는 사람들로 이어지고 있다.

  “1971년에는 태풍에 휩쓸려 죽을 뻔한 적도 있었어요. 인천에서 출발해 안면도까지 가야 했는데, 안흥만쯤 도착했을 때 갑자기 태풍이 불어닥치는 거예요. 간호사들과 일행들을 먼저 내리게 하고 제일 늦게 내리는데 집채만한 파도가 눈앞에 보이더군요. 정신을 차려보니 바닷가 허름한 집에 누워 있더군요.”
  죽음 직전에서 깨어나 정신을 차린 그가 느낄 수 있었던 것은 따뜻한 기운과 진한 커피 향이었다. 흐르는 눈물이 얼굴을 타고 흐르던 따뜻한 느낌은 평생 잊을 수 없는 기억이 됐다.
    “다시 태어났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러면서 이들과 함께해야 한다는 의무감이 더 강해지기도 했고요.”
  본래 국문과를 졸업한 그가 의사가 되기로 결심하고 편입시험에 응시한 것은 ‘내가 아닌 남을 위한 삶’을 살아야겠다는 깨달음 때문이었다. 해부학에 대한 정보를 원했던 시험답안지에 ‘노폐물로 가득한 정맥 같은 삶을 버리고 의사가 되어 동맥 같은 삶을 살고 싶다’는 간절한 편지로 대신했던 다짐은 지금까지도 여전히 유효하다.
  “섬에는 이제 예전처럼 사람들이 살지 않아요. 그래도 1년에 한 번씩은 찾아가고 있죠. 1994년부터는 관악구에 사는 학생들을 대상으로 장학회도 설립했죠. 앞으로도 몸을 움직일 수 있는 힘이 남을 때까지는 일을 할 겁니다.”
  남을 위해 봉사하는 삶은 어릴 적 할머니와 어머니께서 보여준 살아 있는 배움의 덕이었다. 감나무 까치밥을 남겨놓는 것에서부터 “남의 집에 가서 밥을 먹더라도 8할만 먹어라”는 말씀은 아직 그의 머릿속에 남아 있다.
  “내가 축낸 음식 때문에 그 집 사람들이 굶을 수도 있다는 말씀을 하셨죠. 뭐든지 내 것보다는 남의 몫을 남겨둘 줄 알아야 한다는 말씀을 지금도 명심하며 살고 있습니다.”

출처 : 신문을 보면 세상이 보인다...
글쓴이 : 곽태섭기자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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